2025. 3. 15. 17:19ㆍ여행자의 삶
*이 글은 제가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써보는 '소설 습작'입니다. 뭐, 그럴 분은 없겠지만, 저작권을 보호해 주세요~ ㅎ
비버와 나는 왁자지껄한 술집에서 처음 만났다.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이 퀘퀘한 냄새가 나는 좁은 공간에 있었지만, 나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낯선 사람들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는 어색함이었다. 몇몇은 서로 알고 있던 사이인듯 막힘 없이 대화를 이어갔지만, 절반 이상은 나처럼 이 자리에 홀로 나온 사람같았다. 미어캣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막상 눈이 마주치면 재빠르게 피하는 건, 혼자 나온 사람들의 생존법이었기 때문이다.
군기가 바짝 오른 군인이 경계 근무를 서듯 외딴 섬의 등대가 바다를 지키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머릿속에 '내가 왜 여기에 나왔을까?'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지난 월요일 회사에서 팀원 A와 있었던 갈등만 아니었어도, 나는 인터넷 카페에서 "이번 주 토요일 같이 술 마셔요"라는 글을 읽고 참가신청을 하지 않았을 터. 그나마 기댈 수 있었던 팀원마저 멀어졌다는 위기감에 나는 낯선 사람들과 술집에 모이는 '번개'를 신청했다. '내가 너무 즉흥적이었나보다', '이런 데서 누구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1차를 마칠 때까지는 있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며 기계적으로 시선을 돌리던 중, 입구쪽 자리에 앉아 있던 비버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본 비버는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경쾌하게 웃으며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과 약간은 까무잡잡한 피부를 보니 밝은 성격을 가진 듯했다. 나는 비버 쪽으로 자리를 옮겨서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비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내게 자리를 내어줄 것 같지 않았다. 소리를 반쯤 누른 듯한데도 유쾌한 리듬이 느껴지는 비버의 웃음소리에 매료된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닌 듯했다.
비버를 처음 봤을 때는 이름도 몰랐다. 자리를 잘못 골라서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비버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에 나는 2차도 가기로 했다. 그 열망이 어찌나 강했던지, 우리 테이블에 앉은 이름도 기억 안나는 사람들과의 재미없는 대화도 견딜 수 있었다.
"닉네임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비버라고 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2차에서 나는 비버 옆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비버 역시 자꾸 자신을 쳐다보는 내가 신경이 쓰였나 보다. 2차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먼저 자리에 앉더니, "여기 앉으세요"라며 나를 불렀다. 모든 게 좋았다. 앞 자리에 비버와 한 마디라도 섞고 싶은지 고장난 녹음기처럼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앉은 것 빼고는.
두 명의 훼방꾼이 있었지만, 나는 비버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비버는 K팝은 듣지 않고 해외 팝만 듣는다. 닉네임을 비버라고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사귀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토요일 저녁에 여기 나와서 사람들 사이에서 '여왕벌'처럼 관심을 받고 있겠지.' 주량은 소주 1병 정도. 주사는 크게 없지만, 숙취는 심하다고 했다. 전혀 놀라울 일 없는 공통점이지만, "나도! 나도 숙취가 심해요"라며 나는 크게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건배를 청했다. "짠~"
우리는 대화가 잘 통하는 것 같았다. 열 개 중에 서너 가지는 비슷했다. 사실 열 가지 주제를 이야기한 것 같지도 않다. 우리 앞에 놓인 훼방꾼들 때문에. 그대도 비율을 따진다면 열 개 중에 서너 가지. 비버는 내 술잔이 비면 쏜 살같이 술을 따라줬고, 나는 웃을 때마다 '나 지금 너무 재미있다'는 신호를 주기 위해 비버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내가 비버보다 나이가 4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말도 텄다. 사실 나만 말을 놓았다. 그렇게 술병이 비워지는 동안, 나는 우리의 교감이 채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2차 술자리도 마무리가 됐다. 모임 주최자는 "3차는 알아서들 가시라"고 했다. 회비를 내고 술집에서 나오니 삼삼오오 흩어지는 분위기다. '어서 용기를 내! 비버에게 같이 가자고 말을 해야지'라고 머릿속에서 요란한 사이렌이 울렸다. '그렇게 들이부은 알코올은 왜 이 때 용기의 연료가 되지 않은 것일까?' 비버 옆에 서 있는 내 가슴만 방망이질을 할 뿐,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비버야. 우리랑 같이 가자."
그때였다. 우리 앞에 있던 훼방꾼이 치고 들어왔다. '우리? 저 새끼들 봐라.' 분명 비버만 빼가려는 속셈이었다. '지금이라도 나서야 해! 안 그러면 비버를 빼앗긴다고.' 머릿속 사이렌은 위긴 단계 최상위 공습경보로 바뀌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 내가 운을 떼려는 순간 비버가 나를 흘낏 쳐다봤다. '신호일까? 용기를 내라고? 동화속 왕자처럼 지금 달려와 너를 구하라고?'
"아니야. 너무 늦었어. 난 집에 갈래. 술도 취하고..."
비버는 이렇게 말하고, 버스 정류장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비버는 나의 도움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스스로를 구했다. 내게 "3차를 같이 가자"고 권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자고 해도 안 가!'라고 자위하며, 비버를 따라갔다.
"비... 비버."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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